펌> 아주 오래 전에 '오 마이 뉴스'에서 퍼온 글입니다.
"어머니, 이젠 괜찮으세요?"
1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는 방에 벌레가 왜 이렇게 많냐고 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눈으로 따라다녔다.
그리고 벌레가 들어갈까봐 멀쩡한 밥그릇을 손으로 가리면서 밥을 드셨다.
얼마간 그러더니 이번에는 벽에서 연기가 난다고 했다.
불이 났으니 꺼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 욕실에 놓아둔 분무기가 종종 그 방에서 나왔다.
▲ 텔레비전을 보는 어머니. 뭐 좀 알겠수?
점점 더 심해졌다.
컴퓨터에다 락스를 부었다.
밤마다 방문을 두드렸다. 불이 났으니 나와서 끄라는 애원이었다.
창문을 열어놓고 건너편을 향하여 합장을 한 채 절을 하기도 했다.
멀쩡히 살아 있는 친지들이 죽어서 불쌍하다고 눈물지었다.
전화가 오면 '너 다시 살아났냐?'고 했다.
올 것이 온 것 같았다.
모범 택시를 타고 남대문 시장까지 가 있기도 하고 대학병원에서 집으로 모셔가라고 전화가 오기도 했다.
식당에 가서는 밥을 몇 그릇 시켜 놓고 성령님과 함께 먹겠다고 한없이 앉아 있어
모시고 가라는 전화도 숱하게 받았다.
낮에는 어머니 혼자 집을 보았는데 집을 비워놓고 휑하니 어디로 나가버리니 집이 완전히 열린 집이었다.
젊었을 때의 기억은 그대로 있어 수간호원으로 취직을 해야겠다고 남의 집 현관문을 두드리고 다녔다.
따라다니며 말리는 내게 '네가 왜 내 앞길을 막느냐'고 정색을 하니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그런 말을 듣는 내가 더 미칠 것 같았다.
식구들 모두 잠이 모자라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우리 할머니가 저렇게 되다니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진료를 받고 약을 지어왔지만 약도 별 효과가 없었다.
어쨌든 어머니를 다른 곳으로 모셔야 우리가 숨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 저기 알아보고는 강원도에 있는 '00의집'으로 가기로 했다.
이불을 사고 옷을 싸고….
차를 타라는 말에 "너희 어디로 이사가냐"고 했다.
차 타는 것이 좋다고 아기처럼 좋아하면서 계속 엉뚱한 소리를 했다.
도착해서 수속을 마치는 동안 어머니가 사라져 버렸다. 나가면 그대로 큰길이었다.
길로 나갔나 해서 애를 태우면서 찾아도 없더니 한참 있다 다른 건물에서 나왔다.
끝까지 속을 썩였다.
관리자들은 치매 노인을 부모처럼 잘 모실 거라고 했지만 어머니가 묵을 방 바로 옆방에서 내가 본 것은 쥐똥이었다.
쥐가 오락가락하는 곳인가? 관리자가 그것을 얼른 쓸어 담았지만 어쩐지 개운하지가 않았다.
그 옛날 풍문여고와 세브란스 전문학교를 나와 간호원으로 일하던 어머니.
젊은 날 우리를 기르느라고 종종 걸음으로 보건소로 출근하던 어머니,
중학교 입학식에 와서 멋쟁이처럼 사진을 찍던 어머니가
말년에 가질 수 있는 것은 방 한 칸에 들어 있는 이불과 옷가지가 전부였다.
방문을 잠그지는 않지만 복도 문은 잠근다고 했다.
나가버릴 염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남은 자유는 화장실에 갈 자유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모진 딸은 거기다 어머니를 두고 왔다.
오면서 운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오늘 저녁부터는 제대로 잘 수가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흘 후에 동생과 함께 가봤다.
엄마는 우리들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가져간 옷은 입지 않고 얇은 겉옷만 입고 있었다.
이야기를 할 때는 뚜렷하게 관리인들의 눈치를 보았다.
어머니는 속삭이듯 말했다.
"저 사람들 무서운 사람들이야."
얼마 후에 다시 가보니 엄마의 손등은 퉁퉁 부어 있었고 등이 아프다고 했다.
틀니까지 빼 놓은 엄마는 살이 다 빠져버려 90대 노인네 같았다.
하루 종일 먹지도 않고 잔다고 했다.
그러니까 식사를 안 해도 그냥 내버려둔다는 이야기였다.
관리인들은 우리를 만나자 더 난리였다. 저 할머니가 옆의 할머니를 때렸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옷을 다 벗고 하도 난리를 피워 자기들이 다쳤다고 했다.
우리 어머니 때문에 다쳤다는 곳을 보니 고름이 줄줄 나오는 걸 반창고를 붙여 놓았다. 새로 생긴 상처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주 작은 소리로 저 사람들이 내 손을 뒤로 꺾고 때렸다고 우리에게 일렀다.
등의 상처는 누가 봐도 할퀸 자국이었다.
몸무게가 50kg도 나가지 않고 150cm도 안 되는 몸으로 누굴 때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들 4남매를 키우면서 한 차례 때리지도 않고 욕 한 번 한 적 없는 엄마가 이제 와서 그 힘없는 몸으로 누굴 때리다니….
우리는 그래도 거기서 항의를 하지 못했다.
아직 어머니를 모시고 나올 마음의 준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해 9월.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집을 청소하다 어머니의 빈방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이 있든 없든 방은 저절로 따뜻하게 데워지고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어머니를 저 방에 모셔다 따뜻하게 잠 한 번 재웠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생소한 생각이었다.
그간 너무 괴로웠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거기서 모시고 나오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다가도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자꾸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내가 쌀쌀맞게 군다고 '쌀쌀이'라고 했는데
그 쌀쌀이가 엄마 생각으로 울게 될 줄은 몰랐다.
동생에게 전화해서 울먹였더니 그래도 같은 집에 살던 정이 있나보다면서
자기는 눈물까지 나오지는 않는다고 했다.
손등이 부은 채 관리인들의 눈치를 살피던 어머니,
약을 잘 먹여달라는 부탁과 함께 내민 돈을 고맙다는 말도 없이 받아 넣던 그 여자들….
그제서야 생각해보니 거기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우리가 그 앞을 왔다갔다 하면서 수선을 피워도 그림처럼 가만히 있었다.
웃는 일도 없고 뭐 하나 물어보는 일도 없었다.
더 이상 거기에 어머니를 있게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어머니를 모신 차가 동네로 들어서자 어머니는 딱 한마디하셨다.
"나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29일만이었다.
그러고 1년.
얼마 전에는 동생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파마 좀 해달라고 똑똑하게 말씀하셔서 우리를 기쁘게 했다.
저녁이 되면 '소화제 좀 달라'고 하면서 약도 스스로 챙겨 드신다.
설거지거리가 있으면 조금씩 씻어 얹어놓는다.
텔레비전도 본다.
거의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말한다. 놀라운 은혜이다.
사람들이 내 말을 대충 듣고 나에게 효녀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효녀라니. 당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안 모시고 싶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자기 엄마를.
- 2003/08/11 오전 8:15('오마이뉴스'에서)
우정이란~~~?? (0) | 2013.02.01 |
---|---|
- 겨울 노래 / 이형권 (0) | 2013.01.21 |
어느 95세노인의 수기......... (0) | 2012.12.08 |
최근 북한 모습이라고 합니다*_* (0) | 2012.12.08 |
긴급 속보 입니다~~~ (0) | 2012.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