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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 녹듯~~~~!!!

안간리 이야기

by ^^지니 2014. 3. 1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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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13일 오후 2시쯤....

김천은 비가온다고 하는데...

엄청나게 많은 눈이 쉬지않고 계속내리고 있습니다.

완전 조~~~용 합니다.

 

 

 

 

 

 

 

 

저녁 밥하기 전에 산경의 모습입니다.

흠~~~사진으로 표현이

거의 안되고 있습니다.

해질녁의 석양도 좋지만....

구름낀 눈오는 저녁시간도

...

오랫만에 느껴보는 귀한시간이었습니다.

 

 

 

 

 

 

2014년 3월 14일....

어제온종일 내린 눈으로

매실나무에 겨우겨우 봉긋이 솟은

매화꽃봉오리가...

눈속에 파묻혀있습니다.

 

 

 

 

 

 

 

에궁~~~ 개나리도 꽃눈이 거의 필락말락 하던데...

얼음꽃에 가려져서...

눈 녹으면 꽃이 필수있으려나~~~~

 

 

 

 

 

길에 쌓여있는 눈이라도 치우기위하여

포크레인작업을 준비중인 울 옆지기....

ㅋㅋㅋ

뭐 남극장보고기지 단원으로 출발하듯이

비장한 각오로 포크레인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의자등걸이에 쌓인눈이 너무 이뻐서

찍으려구 포즈잡고 한컷찍고난뒤

곧 바로 눈이 털썩 내려앉네요

아~~~너무 허무해요*_*

 

 

 

 

눈세계에 흠뻑취하여

시간가는줄 모르고 여기 저기,

이곳저곳 ....

마구 찍으면서 다녔습니다...

 

 

 

 

 

 

청 노 루

                                  박 목 월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님의 시에서 나오듯이...

몇시간만에 봄눈 녹듯이 나무에도,

길에도,

의자에도...

눈이 녹아버렸습니다.

소중한 그무언가가 저리 봄눈 녹듯 녹아없어진다면...

너무 아쉬울터지만....

행여라도 마음의 근심...

있으시면,,,,, 저리 봄눈 녹듯 녹아없어지소서~~~

 

 

 

 

고서에서는 봄눈을 어찌 표현했는지

한번 살펴보았더니 금오신화에

짧은시로 표현되어진것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금오신화(金鰲新話) / 김시습
    * (자라 오)의 속자

 
조선 세조 때 김시습이 금오산에서 창작한 최초의 한문 소설로

 

창작 당시 몇 편이었는지 알수 없으나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등의 5편만 현재 전하고 있는 전기(轉奇)적 한문소설집이다.
 
김시습(金時習) : 

 

신라 알지왕(閼智王)의 후예인 원성왕(元聖王)의 동생 주원(周元)의 후손이다.

 

무반 계통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며 본관을 강릉이다.

 

조선 초기의 문인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이며 호는 매월당(每月堂), 동봉(東峯)이다.

 

다섯살의 나이로 한시를 지어 세종에게 신동이란 말을 들었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실망하여 승려가 되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일생을 지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주기론(主氣論 : 동양 철학에서 ‘氣’를 세계의 근본으로 보는 이론)을 주장하는 한편

 

민생을 중시하는 민본, 애민적인 사상가였다.

 

저서로 「금오신화」와 「매월당집」이 전한다.

 

단란한 가정을 가져보지 못하고 방랑 생활로만 일관된 생활을 한 김시습은 자(字)를 열경(悅卿)이라 하고, 

 

법호 설잠(雪岑)을 비롯하여 淸寒子, 梅月堂, 梅月居士, 梅月處士, 碧山淸隱, 東峯 등 여러 호를 썼으나,

 

‘매월당’과 ‘동봉’이 가장 많이 알려진 호이다. 

 

그의 인품은 풍채가 왜소하여 위엄이 별로 없고 용모가 불미하여 남의 호감을 사지 못했으며,

 

성격이 강직하여 사람들의 과실을 용납하지 않았으니, 도량이 큰 위인은 아닌 것 같다.

 

또 그의 호탕한 성격은 그로 하여금 육십 평생을 방랑케 하였고,

 

그의 편벽한 성격은 세조의 찬탈을 끝까지 용납하지 않았으며,

 

성종과 같은 성군을 만나고서도 츨사할 용기를 내지 못했으니,

 

동봉은 성격상으로 봐서도 그 평생이 불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병약한 몸이고 보니 신경이 나약해지고, 출사에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   문>

  其1. 만복사 저포기((萬福寺 樗蒲記)
 
만복사의 저포(백제 때부터 유래한 윷놀이 종류) 놀이를 쓴 것으로 

 

남녀간의 사랑과 세속적 삶의 초월을 그림.
 
전라도 남원에 양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만복사 구석 동편에 방 한칸을 얻어 외로이 살고 있었다.
그 방 앞에 배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으니 봄을 맞이하여 꽃이 피어나서 온 뜰안이 은세계를 이룬 듯 아름다웠다.
그는 외롭고 답답할 때면 달밤의 배나무 밑을 거닐면서 시 읊기를 즐겨 하였다.
 
     한 그루 배꽃나무 외로워 벗삼으니
     시름도 한도 많은 달밝은 이 밤에
     외로운 창가에 홀로 누웠으니
     어느 곳 고운 임이 퉁소를 불어오나
     비취는 외로운 것 짝 잃고 날아가고
     원앙새 한 마리가 맑은 물에 노니는데
     그 뉘 집 아가씨에게 이 마음을 붙여 두고
     시름없는 깊은 생각 바둑이나 둘거나
     등불 가물가물 이내 신세 점치는 듯
 
양생이 시를 읊고 나니 문득 공중으로부터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대가 정말 고운 배필을 만나고자 한다면 그 무엇이 어려우랴!"
이 날 양생은 저녁 예불이 끝나기를 기다려 법당으로 들어가,
"오늘 제가 부처님을 모시고 점막대
(점치는 막대기) 놀이를 해볼까 합니다.  만약 소생이 진다면 불회의 설법하는 자리를 베풀어 부처님께 보답하겠으며, 그렇지 아니하여 만약 부처님께서 지신다면 아름다운 여인을 제 배필로 점지해 주십시오."
하고 점막대를 던졌다. 결과는 양생의 승리였다.
양생은 불탁(佛卓 :
부처를 모신 탁자) 밑에 숨어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얼마 안 가서 꽃같은 여인이 들어오더니 부처님 앞에 엎드려 슬피 울며 축원문을 꺼내어 읽는 것이었다.
"요즈음 왜구가 쳐들어와 노략질하매 친척과 종들이 피난길을 떠났으나 소녀는 가냘픈 몸이라 피난을 못 가고 깊은 안방에 틀어박혀 정절을 더럽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이 딸의 수절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소녀를 궁벽한 곳으로 옮겨 살게 한 지 삼 년이나 되었으니 외로움을 이길 길이 없었습니다. 제게 꽃다운 인연과 배필을 점지해 주소서."
불탁 밑에 숨어서 이를 엿보던 양생은 뛰어나와서 여인을 데리고 법당 앞 행랑채 끝에 있는 좁은 방으로 가서 남녀의 즐거움을 누렸다.
밤이 깊어 달이 중천에 솟아올랐을 때 여인의 시녀가 찾아왔다.
"오늘의 가연은 부처님의 덕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너는 집으로 가서 주안상을 차려 가지고 오너라."
시녀가 명을 받들어 주안상을 차려 가지고 오자 두 사람은 혼인 잔치를 베풀었다.
때는 이미 사경(四更 : 새벽 1시부터 3시 사이, 丁夜)이 가까웠다.
양생은 가만히 주안상의 그릇들을 살펴보았다.
그릇엔 아무 무늬도 없고 술잔에서 기이한 향내가 진동하는데 인간의 것이 아닌 성싶었다.
양생은 속으로 은근히 의심이 갔으나 곧 별달리 생각지 않았다.
여인은 시녀를 시켜 권주가를 부르게 한 다음 양생에게 노래를 짓도록 청하고, 양생이 지은 노래를 다시 시녀를 시켜 부르게 하였다.
 
     봄 추위 쌀쌀한 바람에 명주 적삼 팔랑이고
     애달퍼라 몇 번이나 향로에 불이 꺼졌던가
     해저문 산 눈썹인 양 가물거리고
     저녁 구름 양산 마냥 펴졌는데
     비단 장막 원앙 이불에 뉘와 더불어 노닐까
     퉁소 한 가락 불어볼꺼나
     덧없는 저 무정 세월 어이 흘러만 가느냐
     봄밤 깊은 수심 둘 곳 없는데
     타오르는 등불 가물거리고 병풍 나지막하게 둘러져
     한갓 헛되이 흘리는 눈물 뉘로 하여 위로받으랴
     기쁠시고 오늘의 이 밤 봄바람이 소식 전하여
     중중첩첩 쌓인 정한 봄눈 녹듯 녹았어라
     금루곡(金縷曲) 한 가락을 술잔에 기울여
     한많은 옛일 느꺼워하네
 
노래가 끝나자 여인은 슬픈 빛을 띠며 말하였다.
"만일 당신께서 저를 버리신다면 저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습니다."
"그대의 사랑을 내 어찌 저버릴 수 있겠소?"
먼 마을에서 닭의 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으니 낭군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마을을 지날 때는 울타리 밑에서 이미 개들이 짖기 시작하였고 한길에도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누구도 양생이 여인을 데리고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양생은 여인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그는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물었다.
"당신 가는 곳이 어찌 이리 황량하오?"
"노처녀의 거처는 항상 이렇습니다."
드디어 개녕동으로 나가 한 곳에 이르니 쑥밭 가운데 한 채의 아담한 집이 서 있었다.
그는 기쁨과 환락으로 연사흘을 즐겼다.
"이곳의 사흘은 인간 세상의 삼년에 해당합니다. 이젠 그만 그대의 돌아갈 때가 되었으니 인간 세계로 돌아가십시오."
여인은 이웃 친척들을 초대하고 이별의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술이 다 하자 여인은 은잔 한 벌을 양생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내일은 저의 부모님께서 저를 위하여 보련사에서 음식을 베풀 것입니다. 당신은 저의 부모님을 뵈십시오. 저도 보련사로 갈 것입니다."
양생은 다음날 아가씨가 이른 대로 은잔을 들고 보련사로 가는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어떤 명가의 행차가 딸의 대상(大祥 : 죽은 지 두 돌 만에 지내는 제사, 大朞)을 치르려고 보련사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그 명가의 종자(從者)인 듯한 사람이 양생을 발견하고 그의 주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아가씨 장례 때 관속에 넣어 묻었던 은잔이 벌써 세상에 도굴되어 나타났습니다."
주인은 말에서 내려 양생에게 다가와 운잔을 얻은 내력을 물었다.
양생은 사실대로 대댭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은 한참이나 멍하고 있더니 입을 열었다.
"내 일찍 딸자식을 왜구의 난리에 죽이고도 미처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개녕사 곁에 묻어 두었네. 오늘이 대상날이라 보련사에 가서 시식이나 베풀까 해서 가는 길일세. 자네는 딸아이를 기다려서 함께 오게나."
약속한 시간이 되자 과연 여인은 시녀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은 손을 잡고 보련사로 향하였다. 여인은 부처님께 절을 하고 흰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아가씨를 본 사람은 없었다. 다만 양생만이 그 뒤를 따를 뿐이었다.
아가씨가 양생에게 말하였다.
"진지 잡수세요, 함께‥‥‥."
양생이 그 말을 그의 부모에게 전하자 부모도 이상히 여겨 밥상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수저 소리만 달그락거릴 뿐이었다.
이윽고 여인은 말하였다.
"저는 한시 바삐 저승길을 떠나야 합니다." 
스님과 사람들이 혼백을 배웅하니 여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슬피 우는 소리만이 은은히 들려왔다. 울음 속에 말이 섞여 들려왔다.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저승길이 바쁘므로 괴로운 이별을 하지만
     임이여, 저버리지 마소서
     애닯하라, 어머니여! 슬퍼라, 아버지여!
     이내 신세 어이하나, 고운 임을 여의도다
     아득하다 저승길이 이 원한을 어이하나
 
여인의 부모가 양생을 향하여 말하였다.
"은잔을 자네에게 맡기네. 내 딸이 가지고 있던 밭 두어 이랑과 계집종 몇 사람도 자네가 차지하게. 이로써 자네는 내 딸을 잊지 말아 주게."
 
양생은 그 후 다시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을 캐면서 살았는데, 그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그 뒷일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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